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형주 공방전/평가 (문단 편집) === 왜 번성 공방전이 중요했나? === 직설적으로 말해, [[적벽대전]] 이후 천변만화하던 천하 정세가 영구히 정지하게 된 시점이 여몽의 형주 점령 직후라는 점에 주목한다면 이야기가 좀 묘해진다는 것이다. 이렇게 동맹이었던 촉한에게 어그로라는 어그로를 다 끌어서 [[이릉대전]]이 발발, 촉한과 동오는 양패구상의 형태로 퇴락해버려 [[삼국시대]]는 1강 2약의 구도로 고착화됐다. 관우의 군대가 [[판청구|번성]]을 공격하기 시작했을 때 조조의 반응이 어땠던가. 당시 번성을 지키고 있던 조조의 장수는 위나라 최고의 장수라는 조인이었다. 뿐만 아니라 방덕, 만총, 조엄 등 충분히 유능한 보좌들이 형북에 포진한 상태였음에도 불구, 조조는 [[우금]] 등이 이끄는 7군과 서황에게 배속된 12영을 연속으로 대 관우 전선으로 파병했다. 거기에 조조 자신이 직접 대군을 이끌고 남하했으며, 손권과의 교섭이 끝난 이후엔 하후돈과 장료를 중심으로 한 강동 전선의 장수들과 서주-청주에 주둔하던 [[장패]]의 군사들까지 소환한다. 앞서 도읍을 옮길 논의까지 있었던 것까지 합쳐 보면, 조조의 반응은 이미 상식적인 선을 넘은 것이 된다.[* 물론 천도 논의는 무마된다. 사마의와 장제에 의해.][* 만일 관우가 양양-번성을 장악하는 데 성공한다면, 다음은 신야와 완을 노릴 것이 분명했으며, 그 위에는 여남이 있고, 여남의 바로 북쪽이 당시 도읍인 허도다. 괜히 조조가 업으로의 천도를 생각한 게 아니다.] 당시 형주는 주유와 조인의 강릉 쟁탈전에서부터 시작하여 청니 대치, 익양 대치 등 여러 차례의 국지전을 겪는 바람에 상당히 피폐해진 상태였다. 더군다나 관우가 여몽을 경계해 예비 병력을 남겼다는 기록까지 감안하면, 관우군의 규모는 기껏해야 4만을 크게 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게 정설. 이렇게 보면, 아무리 관우가 [[만인지적]]의 용장이자 유비 휘하 최고의 장수라 한들 조조가 그렇게까지 두려워 할 이유는 없지 않았을까. 아무리 용맹이 뛰어나고 군재가 좋다 한들 일단 이끄는 군의 규모가 위협적인 다음에야 크게 대비를 할 일 아닌가. 그러나 여기서 시각을 좀 더 넓혀 본다면 이야기가 좀 달라진다. 번성전을 번성에 국한된 전장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유비가 조조를 상대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승기를 잡았던 [[한중 공방전]]의 연장선상에 놓고 번성전을 본다면 어떨까. 유비가 한중에서 조조를 꺾고, 나아가 한중왕을 자칭한 사건은 피아를 가릴 것 없이 모두에게 거대한 충격을 가져다 주기에 충분한 사건이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그 어떤 세력에게도 크게 못 미치던 최약체 방랑 군벌이, 불과 수 년의 영토 확장 끝에 최강자라는 조조를 상대로 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인 의의는 무시할 만한 것이 못 된다. 물론 조조에게 있어 실리적인 피해량을 따지자면 적벽전보다는 상황이 나았겠지만, 전체적인 그림을 보자면 그게 아니올시다였다는 건데, 적벽전 직후로는 당장 중시해야 할 전선이 합비와 형북 일대 뿐이었겠지만, 한중전 직후로는 판도가 변해도 너무 크게 변한 시점이었다. 당장 형주에 관우가 있고, 강동에는 손권이 있다. 사실상 서쪽과 남쪽 전체가 적인 상황에 대전급 규모의 전쟁에서 패했다는 것은, 그 한 번의 패배로 끝날 일이 아니라 차후 전역에서의 어마어마한 피해를 예고하는 일이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실제로 형주의 관우는 한중전이 끝나는 것과 거의 동시 시점에 북진을 개시했다.] 이렇게 보면, 조조가 양번 전선에 전력을 다했던 것은 관우라는 인물 자체에 대한 두려움 뿐만은 아니었을 가능성이 크다. [[한중]]에서 이미 한 차례 꺾인 판국이다. 여기에 천에 하나라도 번성이 관우에게 깨뜨려진다면, 그리하여 관우에 대한 호응 반란 세력의 준동이 거세진다면, 더하여 기세를 탄 유비와 손권이 각기 서쪽과 동쪽에서 북진을 시도하게 된다면, 그건 그야말로 위나라 최후의 날...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조조는 자신이 구축해왔던 세력의 사활을 걸고 각지의 공격을 막기 위해 총력을 기울여야 했을 것이다. 어찌 됐건 [[제갈량]]은 출사하면서부터 형주와 익주의 동시 공격을 제안했던 바 있고, 손권이 표면적으로는 유비와 동맹 관계였음을 상기한다면, 위나라를 상대로 한 세 방향에서의 대대적인 공세가 결코 허황된 꿈만은 아니다. 여기에, 손권이라면 몰라도 [[유비]] 입장에서는 그 때가 조조에 대한 최대의 공세로 나갈 수 있었을 마지막 시점이었다는 것도 고려할 만하다. 손권은 상대적으로 젊다 쳐도, 조조와 유비는 이미 노인장 소리 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였던 데다, 관우를 비롯한 휘하의 주력 장수들도 노쇠를 걱정할 때였다. 아직 주력 멤버들이 건재할 때, 자신이 이끄는 세력이 절정기에 다다랐을 그 때가 유비 입장에선 최고의 기회였던 동시에 마지막 기회였던 셈이다. 승세를 탄 시점에서 확실히 조조를 몰아붙이지 못하면, 최소한 중원의 판도에 개입할 수 있을 만큼의 상황을 만들어 놓지 못한다면 기회를 날려먹는 거고. 아무리 조조가 적벽과 한중에서 몇 차례 꺾였다 한들, 그의 영토와 장수진과 병력은 여전히 천하 최강이었다. 그 불리하기 짝이 없는 전력비를 어떻게든 무마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바로 관우의 북진이었다고 생각하면, 조조가 번성전에서 펼쳤던 이중 삼중의 대응책은 결코 과민 반응이 아니다. 당장 [[만총]]부터가 조인과 제장들을 만류하며 어떤 말을 했던가. 물론 이는 전부 가정과 추론에 불과할 뿐, 실제 역사는 그렇게 흘러가지 못했다. 관우는 양양을 포위하던 도중에 강릉 함락으로 물러나야 했으며, 여몽은 형주(정확히는 형남 한정)를 공격하여 영구히 자국 영토화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유비는 [[이릉대전]]이라는 초유의 복수전을 감행했지만, 이 또한 곪고 곪았던 양국의 상처가 최악의 형태로 발현된 것일 뿐 위나라를 상대로 하는 합종에 있어선 그 어떤 이익도 주지 못했다. 손해만 잔뜩 안겼을 뿐 아니라 자신의 나라까지 망하게 할 뻔 했으니. 비록 제갈량이 어떻게 수습에 성공하긴 했지만, 결국 촉한은 그 리스크를 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극복하지 못하고 삼국 중 가장 약한 나라로 주저앉게 된다. 이런 세력 약소화와 손해가 유비 입장에서만 논할 것이었다면 차라리 나았을는지도 모른다. 사실 관우의 북진은, 손권에게도 충분히 어느 정도 기회가 될 수 있지 않았을까. 앞선 선례를 보면, 원소와 조조가 서로를 노려보는 동안 손책은 서주를 공격하고 허창을 급습하려 했고, [[주유]]는 적벽 직후의 조조가 세력 정비에 여념이 없는 동안 양/형/익주를 겸병하고 마초와 손을 잡아 북진할 계획을 세웠다. 손권의 상황도 그에 못잖았다. 익주에 유비가 있고 형주에 관우가 있었으며, 실제로 조조는 엄청난 힘을 기울여 그 둘을 막기 위해 분전하고 있었다. 전략적 여건이라면 손권에게도 분명 기회가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손책/주유와 손권의 선택은 전혀 달랐다는 것이고 ... 물론 서쪽에선 제갈량이, 동쪽에선 육손과 주연 등이 수 차례 혁혁한 전과를 올린 것은 사실이다. 기산에선 사마의가 패배했고, 석정에선 [[조휴]]의 위군이 만 단위로 깨지는 등 강한 타격이 없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북진은 위나라의 각 전선에 대한 위협은 될 수 있었을지 몰라도, 제갈량과 주유가 각기 내놓은 대전략이나 [[마초]], 관우의 행동처럼 전략적으로 거대한 변동을 일으킬 만한 요소에는 이르지 못했다. 조조라는 초세의 영웅이 [[순욱]] 같은 대전략가/대정치가의 보좌를 받고, [[조인]]과 [[하후연]] 등 유능한 장수들이 영토 확장에 앞장을 서는 등, 수십 년 넘게 기반을 다진 위나라 ... 그 압도적인 국력 앞에서 유비와 손권이 이끄는 세력의 역량이 부족할 수밖에 없는 건,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스타트 지점 자체가 달랐으니까. 그러나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이라 한들, 전략적인 여건과 각 세력의 합종이 받쳐만 준다면 얼마든지 강력한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수 차례에 걸쳐 증명된 바 있다. 당장 십만 단위로 조조군을 수장시킨 적벽전만 해도, 근간을 잃고 도주하던 처지의 유비와 당시까지만 해도 지방의 중소 군벌에 불과했던 손권이 힘을 합쳐 이뤄낸 협동의 결정체가 아니었던가. 나아가 한중전에서의 조조군 격퇴와 관우의 북진, 이에 호응하는 지방의 반란 세력들, 거기에 시점이 어긋난 일이긴 했지만 위풍의 난과 같은 내부 모순들까지 결합된다면, 그러한 세력/국력의 격차를 전략적 구도 위에서 뒤집는 것도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한나라를 비롯한 숱한 제국 창업의 인과가 그러한 수순을 밟았다. 당장 조조만 해도 맞서는 게 불가능하다는 원소를 꺾고 나라를 세운 예가 아니었느냔 말이다. 그러나 관우가 번성 공략에 실패하고, 손권과 유비의 불안정한 동맹이라는 곪고 곪은 상처가 이릉대전이라는 최악의 형태로 터지면서 천하 정세의 변동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게 된다. 단순히 위나라가 한 위기를 넘기고 끝난 게 아니라, 정세를 뒤집을 만한 전략적 요소의 출현이 완전히 끝장이 나고 만다는 이야기다. 결국 위나라는 여전히 최강의 세력으로 군림하게 됐고, 내분 끝에 남겨진 오와 촉의 국력은 ... 단순히 촉이 좋고 유비가 좋고 관우가 좋아서, 그런 그들을 공격했다는 이유로 손권과 [[여몽]]을 욕하는 건 절대로 잘못된 일임이 확실하다. 손권이 무슨 유비의 아랫사람도 아니고 그 좋을 일만 하라는 논리가 도대체 말이 되나. 더군다나 위나 오나 촉이나 어느 쪽이 더 위협적이냐의 문제지, 결국 모두가 경쟁자이고 종국에는 적대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을 유비나 손권이나 몰랐을 리도 없고. 다만, 손권과 여몽이 택한 형주 급습을 굳이 비판한다고 하면 저런 이유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들의 선택이 낳은 삼국 정립의 형태가, 당장의 세력 확장이라는 측면에서라면 이득일 것이되, 천하라는 구도 위에 놓고 평가한다면 어떻게 봐도 오촉 양국에 득이 될 게 없다는 점──천하의 통일을 목표로 하든 세력의 유지를 목표로 하든──에서 기인한 게 아닌가, 국력의 비율은 고정되어 더는 움직이지 않았고, 위나라에 대한 두 나라의 공격은 결국 국지전 수준에서 그치고 말았다는 것이 손권(+여몽) 의 형주 급습에 대한 비판의 핵심점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사실 [[손책]]의 북진이나 [[주유]]의 서진이나, 여몽이 거론했던 서주 공략의 선택지만큼 어려웠을 일이라는 건 자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책과 주유는 그 리스크를 알고서도 최선에 도전했고, 여몽은 차선을 선택했다는 것이 전후의 차이가 아니었을까. 문제는 이 형주 영유권 분쟁에서 (그 주체가 유비와 손권이었다곤 해도) 살살 관계를 주물러 자신의 입맛에 맞는 결과를 내버린 쪽은 결국 위나라였다는 건데, 나름대로의 연횡책이었달까. 연합의 합종을 위해 소진의 역할을 맡을 만한 역량을 지닐 인물로는 첫손에 [[노숙(삼국지)|노숙]]이 있고 두손에 제갈량이 있었다지만, 전자는 요절했고 후자는 이릉 후에야 외교 전략적 능력을 발휘했으니 참으로 통탄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만약 봉추가 살아서 익주 지방에서 정치를 하고 복룡이 형주에서 동오와 외교를 했다면 세력 구도가 어떻게 됐을지도 재밌는 이야깃거리이다. 그렇게 촉한과 동오의 갈등이 뒤로 미루어지고 관우가 번성을 공략할 때 동오에서도 서주를 공격했다면 양면 전선에서 조조는 매우 고달팠을 것이다. 하지만 역사에 만약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손권은 이런 선택을 했기에 동오는 이후로 한 번도 합비를 넘지 못 했고 장강 이남에서 틀어박혀 있었으며 제갈량은 기산에 나아갔음에도 제대로 된 성과를 내지 못 하고 끝내 오장원에서 생을 마감하니 역사는 결국 쿠데타를 일으킨 사마씨의 승리로 끝나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